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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 얘기, 사실 내 얘기

임재민_ 2018. 1. 29. 21:08

아는 사람 얘기, 사실 내 얘기

임재민

 

  닐 사이먼의 '굿 닥터'. 소설가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들을 각색한 단막극 모음집이다. 각각의 단막극을 이끌어나가는 '작가'는 등장인물이 되기도 하고, 3자로서 자신이 쓴 이야기를 전개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말하는 듯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말한다. 각각의 단막극들은 높은 분에게 잘 보이려다 실수를 저지른 하급 관리, 이런저런 이유로 월급을 떼이는 가정교사, 자살 소동을 벌여 돈을 버는 사람 등 다들 다른 이야기지만 결국엔 하나의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부산 각지에 붙어있는 공연 '아는 사람' 포스터를 봤다. 부제는 '닐 사이먼의 '굿닥터를 읽고...'였다. 그걸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닐 사이먼의 대본을 공연하거나 각색한 것도 아니고, '읽고' 만든 연극? 대체 무슨 내용인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 궁금증은 연극을 본 다음에야 풀렸다.

  민락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눈앞에 보이는 효로민락소극장. 그 안에 들어가니 배우가 미리 연극을 하는 것처럼 책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단순한 배우가 아니었다.

  자신을 소개하는 배우. '극단 새벽' 내 청년들로 이루어진 극예술연구회에서 작가를 맡고 있다고 했고, '굿 닥터'의 도입부에서 작가가 자신을 소개하듯 연극 '아는 사람'을 만들게 된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닐 사이먼의 연극을 이리저리 고쳐보다 표절스러운 이야기들만 나와서, 고민 끝에 일종의 독후감과도 같은 느낌으로 만든 연극이라고 했다. 나누어진 이야기들이지만 공통점과 공감할 지점이 있고, 작가가 화자도 되고 배우도 되는 여러 개의 단막극이란 굿 닥터의 틀을 이용한 연극. 주변 아는 사람 이야기라지만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청년들의 이야기로 채워 넣은 연극.

  첫 이야기는 편의점 이야기였다. 편의점뿐만 아니라 아르바이트를 여러 번 해본 적이 있어 우격다짐으로 막 대하는 손님, 음식을 먹고 치우지 않는 어린 손님, 월급 이야기만 나오면 민감해지는 사장님, 이해할 수 없는 본사의 정책 등 이전에 경험했던 불합리한 일들이 생각나서 답답하기도 했다.

  그다음으로 서바이벌 프로그램처럼 본심과는 다르게 서로를 적으로 대해야 하는 취준생들의 이야기, 본 업무보다 허드렛일을 더 많이 하고 사장님은 사기그릇에 자신은 종이그릇에 밥을 먹으며 먼저 퇴근을 할 수 없는 신입사원의 이야기, 남성중심주의 화장실 문화에 대한 불합리함을 제기하는 여성의 이야기 등 많은 청년들이 공감할만한 이야기들이 나타났다. 경쟁, 복종, 젠더문제 등 청년들이 피부로 겪고 있는 이야기들이 나타나 때론 열받기도, 때론 씁쓸하기도 하며 온갖 감정들이 연극을 보는 내내 교차되었다.

  물론 불편하기만 한 연극은 아니었다. 삽으로 퇴근용 땅굴을 파서 정시에 퇴근하는 신입사원, 남녀가 같이 쓰는 좌변기를 남성이 우선적으로 서서 쓰는 게 당연하다는 양 관객들에게 물어보다 예상과는 다른 답을 듣고 머쓱해하는 남자 등 중간중간 속이 시원해지는 장면들이 나왔다.

  연극이 끝나고, 무대인사를 위해 극예술연구회 청년들과 청년들을 지도한 극단 단원 분들이 올라왔다. 극작 지도를 맡은 단원분께선 기존의 극단 인원들로만 하는 작업이 아닌, 중년의 베테랑 단원들과 청년 단원들이 함께 연극을 만드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고 했다. 또 극단 활동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지역 기반 팟캐스트와 여성들이 연극을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적극 표출할 수 있도록 돕는 여성연극교실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며, 부산 지역에서도 특정 예술만이 아닌 전반적인 예술과 문화가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이미 있는 연극 상연이나 이야기를 짜는 데 한계가 있는 각색이 아닌, 독후감 연극이라는 개념을 보니 신선했다. 동시에 청년들이 직접적으로 겪은 이야기들로 극본을 쓰면서 허구의 이야기를 지어내지 않고도 공감 가는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다는 게 굉장히 의미있단 생각이 들었다. 어떤 공동체든지 새로운 이들이 들어와야 순환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연극을 하는 청년들을 더욱 많이 볼 수 있다는 게 같은 청년으로서도,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도 참 기분 좋은 일이었다.